누스바움은 역량 접근법에서 인간이 역량을 갖기 위한 조건으로 신체 건강을 지목한다.
건강을 유지하고 재생산 능력을 가지려면 충분한 영양과 안락한 보금자리가 필수적이다.
더 나아가 노인은 세계보건기구가 제시한 건강에 대한 관점인 웰니스(wellness) 즉 신체적 안녕을 위한 의료뿐만 아니라 정신, 환경, 사회의 건강을 보장받아야 한다(Nussbaum).
현재 한국의 상황은 어떨까?
2017년 79세 노인이 화재로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독거노인 한 씨는 24시간 돌봄이 필요한 하반신마비자로 재가 서비스를 받고 있었지만, 제도적으로 보장 가능한 최대 돌봄 시간은 하루 네 시간에 불과했다.
독립영화 < 일등급이다>에서 노인은 요양등급 1등급을 받기 위해 노력한다.
그는 무료로 요양병원에 들어가기 위해 중증 치매인 척 연기를 한다.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가 있지만, 여전히 본인부담금과 비급여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한 달에 50여만 원 정도의 본인부담금은 노인 스스로 책임지지 못하면 온전히 가족의 몫이 된다. (...)
치매는 우리 사회에서 두려워하는 노년의 질병 가운데 하나이다.
돌봄이 필요한 질병이기도 한 치매를 통해 노인이 건강을 잃었을 때 중시해야 할 원칙을 생각해보자.
치매는 뇌 손상으로 인해 오랜 시간에 걸쳐 기억과 사고 능력이 점차 감퇴하여 일상적인 생활에 지장이 생기는 진행성 질병이다.
기억력 감퇴 등의 초기증상은 노화현상과 잘 구분되지 않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치매 증상이 나타나도 바로 병원에 가서 진단받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국의 경우 치매 증상이 나타난 후 진단을 내리는 데 대략 3~4년이 소요된다. 증상이 나타나면 곧바로 전문가가 진단을 내릴 수 있는 서유럽과 비교된다.
영국의 경우 ‘가정의’ 제도 덕분에 주민들은 의사의 상담을 일상적으로 받을 수 있다. 진단이 빠를수록 경증에서 중증으로 진행을 늦출 수 있는 치매 진료에서 ‘가정의’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상식에 따르면 치매 환자는 판단 능력이 없다. 과연 그럴까?
치매는 서서히 진행되기 때문에 경증의 경우 증상이 간헐적으로 나타나지만, 판단력은 여전히 갖고 있다.
기억력이 깜빡깜빡한다고 해서 인지능력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치매를 조기에 발견한다면 환자 자신이 치료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 ‘가정의’ 제도를 통해 초기 단계에 치매를 발견한다면 환자가 자기 결정권을 행사할 가능성도 커진다.
그렇다고 치매가 진행되어 중증에 이르면 모든 것을 의사나 사회복지사 등의 전문가가 진행해도 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판단 능력이 저하되더라도 개성이나 감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성의 능력이 약하다고 해서 사람이 아닌 것은 아니잖은가.
치매 치료 및 돌봄에서 중요한 원칙이 있다.
첫째, 치매 환자가 모든 의사결정에서 당사자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한 조기 진단이 매우 중요하다. 서유럽의 경우 ‘가정의’가 이 일을 한다. 가정의 시스템은 치매를 일찍 발견하고, 치매의 진행을 늦추기 위한 치료 과정에서 당사자가 판단할 수 있도록 한다.
반면 한국의 경우 치매 증상을 노인의 특성으로 자각하는 경향이 있고, 진단에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에 전문가 상담은 증상이 나타나고 상당한 시간이 흐른 이후에야 이루어진다.
둘째, 개인의 삶의 역사와 개성, 감정이 고려된 돌봄을 해야 한다.
영국은 치매 환자에게 1인 1실을 제공하고 그 밖의 환경도 치매 환자의 평소 취향에 맞춰 조성한다는 돌봄 원칙을 갖고 있다.
집에서 돌보는 재가 서비스는 환자 맞춤형으로 제때 공급을 원칙으로 한다. 따라서 재가 서비스 덕분에 가족이 돌봄 부담이 크지 않다.
오쿠마 유키코의 <노인복지 혁명>은 북유럽과 일본의 노인 돌봄 실태를 비교한 책이다.
오쿠마 유키코는 북유럽에 ‘네다키리 노인’ 즉 노환이나 질환으로 누워있는 노인이 없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는다.
그는 현장을 확인한다.
“연분홍 드레스의 부인과 이야기를 했다. 남편과 사별한 주부였다.
국민연금만으로 생활하고 있다. 자택에서 혼자 살며, 기저귀가 필요한 몸이었다. 기저귀를 하고서도 멋을 낼 수 있는 문화가 이 지구상에 있다니!”
( 오쿠마 유키코)
북유럽 노인들은 요양원에서도 좋아하는 커튼이나 융단으로 꾸며진 자기 방을 가질 수 있다.
추억이 어린 물건이 가득한 공간에서 개인의 취미생활도 최대한 보장받는다(오쿠마 유키코).
오쿠마는 이것이 가능한 이유로 국민연금과 무상의 돌봄시스템을 꼽았다.
예를 들어 국가가 제공하는 노인 돌봄 가정도우미(돌봄 노동자)의 경우 일본을 한 명으로 했을 때, 노르웨이는 51.5명, 스웨덴은 43.7명(1985년 전후)으로 나타났다.
오쿠마는 1990년의 일본의 실상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해외에 알려진 아름다운 ‘일본형 복지’, ‘가족적 간호’는 실은 ‘어버이 버리기’와 동등하다.”
“일본에서 복지시설에 들어가는 것은 세 번의 죽을 맞는 것이다.
첫째, ‘나 죽었다’라는 기분으로 입소해야 한다. 가까이 두고 쓰던 물건은 골판지 상자 두 개 분량으로 단념해야 한다.
둘째, ‘자기를 죽이고’ 지내야 한다.
셋째, ‘생물로서의 죽음’이 찾아온다.” (오쿠마 유키코)
한국도 일본과 비슷하다.
치매가 발생하면 전문가나 서비스 공급자 중심으로 치료 방법과 케어 방식이 정해진다. 치매 환자는 판단능력을 잃은 치료의 대상이 된다.
단적인 예로 요양기관에서는 환자에게 유니폼을 입힌다. 관리를 편하게 하기위한 조치이다.
수용소형 노인병원이나 요양원은 치매 환자의 개성과 감정, 습관, 취미와 기호 등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클래식과 트로트 중 어떤 음악을 좋아하는지 따위는 전혀 고려가 되지 않는다.
즉 치매 환자는 더 이상 개성과 감정을 지닌 사람이 아니다. 표준화된 서비스의 대상일 뿐이다.
세 번째 돌봄 원칙은 사회화이다.
건강을 잃은 노인을 케어할 때 중시해야 할 세 번째 원칙은 돌봄의 사회화이다.
한국에서도 부유층에겐 조기 진단과 당사자 중심의 돌봄이 가능하다. 하지만 일반 시민들에게 이것은 불가능하다. 비용 부담 때문이다. 대부분 시민에게 돌봄은 형벌이다.
“돌봄이라는 형벌을 받는 듯했다. 개인 시간이 없어지고 금전 부담이 커지고 무엇보다 아빠의 돌발 행동을 제어하지 못했다.” (조기현, 아빠의 아빠가 됐다)
복지제도가 제대로 되어 있다면 간병 살인이나 가족 간의 불화가 줄어들 수 있다.
북유럽의 경우 가정도우미가 수시로 체크하고, 요양원이 집 부근에 가정집처럼 존재하기 때문에 환자와 자식 사이에 돌봄을 둘러싼 갈등이 거의 없다.
“대부분 부모와 자식이 전화로 매일같이 서로 연락을 취하고 있다. 40%가 10분 이내에 갈 수 있는 거리, 70%가 30분 이내에 갈 수 있는 거리에 살고 있다.”(오쿠마 유키코)
돌봄노동은 국가 시스템이 제공하고 가족은 사랑을 주면 된다.
효를 강조하는 유교주의 국가에서 부모와 자식 간의 유대가 강할 것으로 보통 생각한다.
그런데 오히려 북유럽에서 더 강하게 나타날 수도 있다. 한국의 경우 치매노인이 생기면, 가족 들 간에 비용 부담과 돌봄의 주체를 놓고 갈등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
‘긴 병에 효자 없다’고 질병이 오래가면 돌봄 주체의 경제적인 부담이 가중되고 육체적인 소진이 나타난다.
반면 북유럽의 경우 치매를 국가가 돌보기 때문에 자녀는 경제적인 부담이나 돌봄노동을 떠맡지 않는다.
국가가 모든 비용과 돌봄 서비스를 부담한다. 자녀는 부모에게 관심과 사랑을 나누면 된다. 그러다 보니 돌봄의 부담과 스트레스가 매우 적다.
한국의 경우에도 돈이 있는 사람들은 복지 체제와 상관없이 가족을 잘 돌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지극히 소수이다.
돌봄 위기 사회는 사회의 경쟁력을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인권을 침해할 소지마저 있다.
이 같은 이유로 돌봄의 주체는 가족이 아니라 국가여야 한다. 더 이상 효자 돌봄 체제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돌보던 20대 청년은 말한다.
“효자라는 말이나 연민과 동정은 차라리 무관심만 못했다.”(조기현, 아빠의 아빠가 됐다)
한국의 경우 2008년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를 도입하고, 치매 국가책임제를 선포했으며, 지역이 돌봄의 핵심적인 주체가 되는 커뮤니티 케얼를 실현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서비스의 질은 물론이고 양도 충분하지 않다.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는 요양이 필요한 정도에 따라 등급을 심사하고, 등급에 따라 요양 서비스를 제공하는 제도이다.
심사를 통과하기도 어렵지만, 힘들게 입원한 요양원은 수용소와 다름없다.
최소 인력으로 이루어지는 저임금,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이 제공하는 돌봄 노동으로는 인간다운 삶을 보장할 수 없다.
질병과 돌봄에 대한 접근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한 발 더 나가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는 건강할 권리(건강권)뿐만 아니라 질병권을 주장한다. 우리 모두 질병을 피할 수 없다면 잘 아플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몸이 아플 시간, 몸이 아플 권리를 줄 필요가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 아픈 것은 가족에게 미안함이 된다.
그리고 정부의 도움을 받으려면 <일등급 이다>에서 처럼 많은 노력이 필요한다.
“가장 위험한 것은 바로 아픈 몸에 대한 자책감이다. 우리는 아플 만해서 아프다. 우리에게는 아플 권리가 필요하다. 자책감은 무책임한 사회에 줘 버리자.”
(조한진희,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건강을 잃더라도 모두를 잃지는 않는 사회가 돼야 한다.
지금처럼 건강을 잃으면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까지도 다 잃는 사회에서는 아픈 사람이 자책감에 빠질 수밖에 없다.
대표적 사례로 송파 세 모녀 자살 사건이다. 2014년 세 모녀는 빚에 시달리다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되었다. 그 빚은 아버지가 암으로 5년 동안 투병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다.
결국 세 모녀의 가장은 자책하다가 자살을 했다. 10년이 지나 그 빚에 짓눌린 세 모녀 또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사회관리가 취약한 가족의 집에서는 건강을 잃으면 다 잃을 가능성이 크다. 세 모녀의 자살은 시민의 집에서는 존재하지 않을 비극이다.
세 모녀의 가장이 암에 걸렸더라도 의료가 무상이라면 빚을 물려주지 않았을 것이다.
(유범상·유해숙저, 선배시민 – 시민으로 당당하게 늙어가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