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시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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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의 대상에서 돌봄의 주체로!
자식농사를 넘어 시민권 확보로!

Senior Citizens Society

당당하게 늙어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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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범상 교수

 

 

선배시민의 태도는 자각, 학습, 소통이다. 이 세가지는 동시적으로 일어나기도 하고 혹은 단계적으로 일어나기도 한다.

자각이란 내가 공동체에서 나의 존재와 의미를 묻는 것이다. 학습한다는 것은 좀 더 나은 공동체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질문하고 토론하는 동료들을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소통은 그 동료들과 함께 학습을 통해 끊임없이 동료와 대화하고 소통하며 길을 내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선배시민이라고 할 만 한 분들 즉 노인들은 자각, 학습, 소통하는 선배시민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그동안 시민교육을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다.

시민은 권리와 실천방법을 토론하고 비판하는 사람이다. 우린 그래본 기억이 없다. 왜 그럴까?

 

 

한국노인은 왜 선배시민이 되기 힘든가?

 

한국 노인들은 똘이장군 세대로 반공주의자로 커왔다.
반공주의 틀에서 오랫동안 국민교육을 받아 온 한국인이다. 누구도 반공주의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은 50년대에도 그랬고, 60년대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반공이라는 것이 다양한 형태로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다.

똘이장군은 반공주의 전형적인 상징인 에니메이션 영화이다.

똘이장군(감독, 김청기, 1979년작)은 1979년 한국에서 개봉된 반공 에니메이션 영화이다. 당시의 반공사상이 짙게 배어있는 작품이다.

똘이 장군 에니메이션에서 노래 가사를 보면 경쾌한 행진곡 풍의 노래이다.

똘이 장군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

똘이 장군 앞서간다. 겁낼 것 없다.

덤 벼라 덤 벼라 붉은 무리 악한 자들아.

무쇠 같은 주먹이 용서 못한다.

 

이 노래는 1980년에 태어난 사람조차도 아는 <똘이장군> 주제가 이다. 만들어 놓고 설날 때나 추석 때나 틀어준다. <똘이장군> 속 공산당은 늑대, 빨간색으로 이미지화가 되어 있다.

지금 현재의 노인들은 반공주의자로 생각이 길러진 한국 노인들이다. 그래서 우리 노인들 입장에서는 비판이라든가, 반공주의로 인해 빨갱이의 눈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비판을 두려워했던 과거 한국사회이다. 반공주의로 살아 온 삶에서 자각하고 학습하고 소통하는 것이 어려워진 것이다.

 

두 번째 이야기는 산업역군들의 이야기이다.

과거에는 산업전사라고 하더니 지금은 연탄재 취급을 하느냐고 묻는다. 한국사회에서 산업역군의 의미는 ‘나’라는 자신은 없고 단지 ‘국가’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은 한국의 노인들은 반공과 성장을 우선시 한 세대들이었다. 대한민국 군인의 베트남 참전과 간호사와 광부의 파독은 한강의 기적을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한강의 기적을 일궜던 과정ㅇ서 국가가 보호해야 할 대상은 누구인가?

시민으로 보호해야 할 산업역군이다. 그런데 ‘가난은 나라도 구하지 못한다.’라고 하면서 가난은 국가가 아닌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것으로 여겼던 한국의 노인들이 되었다.

외국인들이 한국을 봤을 때 정말 희한한 나라라고 생각한다.

 

외국인들이 묻는 말이다.

“우리는 국가가 보호하지 않으면 시민들이 난리가 나는데, 한국은 어떻게 가족이 알아서 챙기지?”

 

외국인들은 우리를 보고 ‘유교주의’라고 한다.

유교주의는 중국 공자의 가르침에서 시작된 도덕 사상으로 인(仁) 사상을 바탕으로 나라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도를 중시하는 사상이다.

실제적으로 영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유교주의적인 한국사회를 연구한다.

 

“우리는 국가가 개인을 보호해주지 않기 때문에 가족이 대신 보호하는 것이다.”

 

모두가 가난했기에 그저 열심히 일하면 잘 살 수 있으리라 믿었던 대한민국이었다.

1970년대 청년과 중년을 살았던 노인들은 국가적 책임에 대한 중요성보다 나와 가족의 노력이 우선이라고 생각하였다.

 

‘가난은 개인이 노력을 하지 않아서이다.’ 라고 생각기도 하고, ‘비판은 부정적이다’라고 살았다. ‘변화를 생각하는 진보보다는 보수가 좋다.’라고 보았다.

‘성장없이는 분배도 없다.’ ‘경제성장만이 나라와 내 가족이 살길이라 믿었던 한국 노인들’이다. 대부분의 노인들에게 이말은 여전히 삶의 진리이다.

이런 와중에 사회복지를 이야기 하면 그것은 좌파, 빨갱이라며 화를 내는 것이 다반사이다.

 

중원노인복지관 고상진 관장은 이렇게 말한다.

“노인들의 이미지로는 고집불통 토론이 어렵고 편견이 강하고, 아집을 가지고 성장과 반공을 중시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생각해 보면 이런 노인들의 특징들 속에는 한국사회의 모순이 담겨있다.”

 

분배보다는 성장만이 대한민국의 희마이라고 믿었다.

비판보다는 순응을 천명으로 알고 가난은 개인의 책임이라며 성장만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며 살아온 노인들이다. 그들의 생각과 삶 속에는 한국사회가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한국노인들의 생각은 비판은 부정적이다. 정치에 중립적이어야 한다. 성장이 분배에 우선한다. 가난은 나라도 구하지 못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있다.

한국노인의 대표적인 생각이다. 조금만 정부비판과 반대의견에 격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한국의 노인의 특징이다.

 

“아 지금의 노인의 모습은 개인의 모습이 아니라 한국에서 살게되면 나오는 당연한 생각들이다.”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당연한 것이다. 즉 이러한 것들은 노인의 생각이 아니라 한국노인이 살아 온 사회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노인의 생각 중 ‘비판은 부정적이다’ 라고 했다. 교수님 다 되는데 ‘교수님은 왜 그렇게 부정적이세요.’ 라는 말을 듣곤 한다.

그럼 ‘뭐가 부정적인데요.’라고 물으면, 한국사회를 비판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렇게 말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뭔가 비판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은 부정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된다. 즉 비판은 부정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한국사회가 좋은 측면이 얼마나 많은 데, 그 동안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로 바뀌었고,

그리고 산업역군이 어마어마한 발전을 이뤘느냐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을 만들었는데 왜 그런 것은 안보고 나쁜 것만 들춰내느냐 하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부정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을 하면 ‘교수님 왜 그렇게 편향적이세요?’라는 말을 듣는다. 편향적이라는 것은 한 사회가 주어진 상식과 정의를 벗어나면 편향적이라고 말한다.

조금만 비판해도 편향적이라고 한다. 우리는 매우 오른쪽으로 기울여져 있어서 조금만 왼쪽으로 들어 올리면 편향적이라고 한다. 서유럽에서 보면 너 왜 그렇게 보수적이냐 라고 질문을 받는다.

 

또한 복지얘기는 성장부터 된 후에 논하기를 바라는 노인들이다. 선성장 후분배이다.

그래서 노인들과 소통하는 것이 상당히 어렵다. 그리고 가난은 나라도 구하지 못한다고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런데 사회복지는 근본적으로 국민의 생활 안정 및 교육, 직업, 의료 등의 보장을 포함하는 복지를 추구하기 위한 사회적 노력이다.

사회복지는 집합적으로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복지를 한다고 할 때 노인들을 만나면 부정적이고, 편향적이고, 빨갱이고 그렇게 보는 경향이 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벼룩이 있다. 벼룩은 자기 몸길이가 2-4mm인데, 벼룩은 자기 몸길이의 200배까지 뛴다고 한다. 보통 키를 갖고 인간이 63빌딩을 뛰어 넘는 수준이다.

그런데 그 벼룩을 데려다가 20만큼 뛰는 병에 가두어 놓으면 처음에는 병뚜껑에 부딪히다가 나중에는 학습 된 나머지 19배만 뛰어 오른다고 한다.

그런 다음 병뚜껑을 열어 주어도 놀라운 것은 19배까지만 뛴다고 한다.

 

이와 같이 우리의 생각이 반공주의, 성장제일주의, 가족주의 안에서 길들여지고 갇힌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 사회는 국가의 그런 생각들이 그들에게 반영되고 교육시켜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노인의 생각은 노인이 살아 온 한국 사회의 생각일지도 모른다.

거기에서 내가 적응하려고 하면 19배까지만 뛰어야 한다. 20배 이상 뛰어 넘으면 그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정치는 중립적이기 때문에 정부를 비판하면 안 된다 등 반공주의, 성장제일주의, 가족주의 속에 살아 온 한국노인의 모습은 한국사회의 모습일 수 있다.

 

 

선배시민의 길을 가기 더욱 어려운 ‘한국노인’들이다. 우리 교육을 들여다 보자.

 

우리 사회에서 선생님은 먼저 대상을 본다.

그리고 그것을 인식하고 다음에 학생들에게 설명을 하여주는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그러면 학생들은 받아 적고 암기한다.

그러면 학생들의 생각은 누구의 생각인가? 학생들의 생각은 선생님이 만들어 주는 범위 안에서만 생각하게 된다.

국민들의 생각은 어느 범위에서만 생각하는가요? 병 속에서만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의 교육은 선생님의 생각, 국가의 생각대로 획일적으로 가르쳐 왔다.

 

미국 윌리엄 피터스의 「푸른 눈, 갈색 눈 실험」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1968년 미국 한 초등학교에서 교사가 학생과 함께한 ‘차별의 날’ 실험 결과를 기록한 책이다.

하루는 푸른 눈 아이들이 갈색 눈 아이들 보다 우세하더라. 다음 날은 선생님이 잘 못 알았다며 갈색 눈 아이들이 푸른 눈 아이들보다 우세하더라고 말한다.

그랬더니 또 역전이 되더라. 이와 같이 선생님이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편견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선생님을 쫓아가면 좋은 학생이 되는 것이고, 저항하면 나쁜 학생이 되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유치원과 학교라는 틀 안에서 한정 된 생각 속에 자라나는 아이들이다. 사실 모두 선생님 밑에서 소유와 노예, 선생님의 학생들이 된다.

열심히 공부하는 것과 은행 저축식 교육으로 될 수 있는 것은 지적인 노예가 된다. 선생님의 생각을 쫓는 선생의 학생들이다. 은행저축식 교육이다.

정보나 지식을 저금통에 입금시키듯 교사가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달하는 교육을 말한다. 이것은 병뚜껑을 막아 놓는 교육이다. 병 밖으로 뛰는 생각이나 능력을 잃을 때가지 실시한다.

동물처럼 사육되고 식물처럼 재배되는 생각이다. 생각이 사육되고 재배되는 것을 우리는 훌륭한 친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교육을 국민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에 온전히 충성하는 교육을 받은 것이다.

반공주의자로서, 산업역군으로서, 가족은 내가 스스로 알아서 책임지는 가족주의자로서 교육을 받은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선배시민이 되는 것을 어렵게 하고 있다.

그래서 선배시민이 되려면 19배 만큼 뛰 던 것을 뛰어 넘어야 한다. 새로운 상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인이 선배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비판에 대한 생각부터 전환해야 한다.

우리나라 자살율 1위, 저출산 1위, 노동시간 1위, 산재사망율 1위, 등록금 1위, 남녀 임금격차 1위, OECD 국가 중 부조리가 가장 많은 나라 대한민국이다.

 

왜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세상을 보는 거죠?

한강의 기적을 이뤘고, 이제는 원조 받던 나라에서 원조국 이 된 최초의 사례이고 또 10위권 경제대국이 아닙니까?

 

비판을 부정이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

 

어르신 비판은 부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비판이야말로 긍정적인 것이에요.

부조리한 것을 드러내고 근본적인 것을 개선하여 더 좋은 공동체를 향한 열망, 희망으로 가득 찰 때 할 수 있는 것이에요. 매우 긍정적인 것인 거죠. 

그렇다면 비판은 긍정적이고 좌파, 순응은 부정적이며 우파로 바뀌어야 하지 않나요?

 

자유주의 철학자 밀의 「자유론」에서 악마의 옹호자가 제시 되었다.

 

“성인을 추대할 때 옆에 두어야 하는 것은 악마의 옹호자다. 성인을 비판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중에서

 

“나는 아테네의 등에가 되고자 했다.” 

 

등에는 소 등에 착 달라붙어서 소 피를 빨아먹는 곤충이다. 소크라테스는

 

“비판이 없으면 아테네가 곧 부패해서 위기에 처할 것이다. 소가 잘 못 갈 때는 물론 잘 가고 있을 때도 물어뜯어야 한다.”

 

비판은 좌파, 우파의 개념이 아닌 비판은 열린사회에서의 공기와 같은 것이다. 즉 비판은 긍정적이며, 인간 존재론적인 본성이다.

비판은 현실을 보다 더 나은 상황으로 바꾸려는 긍정적 에너지이다. 긍정적인 것은 인정하고 계승하는 것이다. 불의나 부조리한 것은 변화시키려는 태도이다.

 

“비판! 대안 없는 비판은 하지마라”

 

왕따 문제 정말 심각합니다. 또 이 집값 말입니다. 전셋값이 천정부지인데다 청년들이 갈 곳이 없는데 정부는 어디서 도대체 뭘 하고 있습니까?

 

대안이 없는 이런 비판 하지 말아야 할까?

인천국제공항 이야기를 해보자. 인천 국제공항은 21세기 동북아시아의 허브공항으로 영종도와 용유도 사이를 매립하여 2001년 3월 29일에 개항하였다.

그런데 사실은 공기를 단축하면서 단기간내에 만들었다. 그런데 그렇게 역사적으로 볼 때 짧은 시간에 만들어진 공항은 늘 문제가 발생한다. 대만, 홍콩 다 그렇다.

그런데 우리는 상당히 문제가 적게 발생하였다. 그 이유는 인천공항을 만들 당시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비판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에는 국책사업인데 비판을 받는 것이 너무너무 싫었다. 하지만 그 비판 때문에 큰 실수와 손실을 줄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결로 그 비판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과적으었다.

그래서 큰 실수를 줄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많은 여러 가지 문제들이 비판을 토대로 했다면 많은 한국사회 문제라는 것이 달라졌을 것이다.

이와 같이 비판은 존재론적 본성이고 사회에 대한 성찰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선배시민의 첫 번째는 자각인데, 자각의 핵심은 비판이다.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아테네의 등에 라면서 아테네 정치를 비판하였다.

그런데 잘 가고 있을 때도 물어뜯는다. 너 왜 물어 뜯어. 그러면 그냥 물어뜯어 봤어. 얄밉게 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도처에서 마치 등에처럼 사회를 물어뜯었다. 결국에는 지배계층에게 미움을 받아 사형을 받았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전기뱀장어이다.

그런데 한 사회에 그런 비판이 있다면 계속 수정을 할 것이다. 그러므로 비판은 어떤 상황에서도 허용해야만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다. 잘 가고 있을 때도 허용해야 한다.

비판은 단지 길의 수정만이 아닌 인간의 존재론적인 본성이다.

 

비판은 부정적일까. 성인을 추대할 때조차도 악마의 옹호자를 두어 성인의 반대편 입장에서 그를 논박하는 역할을 맡도록 성직자이다.

즉 카톨릭에서는 성인을 추대할 때 성인을 비판할 악마의 옹호자를 임명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 사회가 잘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비판은 더 나은 사회를 향한 열정이자 대안이다. 그런데 비판하면 부정적인 것이고, 비난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흔히 비판을 저지하는 말이 있다. ‘대안 없는 비판은 하지 마라’이다. 비판 그 자체가 대안이다. 또 한가지는 중립을 지켜라 한다. 그렇지만 “해(태양) 아래 중립은 없다.” 이다.

 

 

두 아이가 싸운다. 엄마는 큰애가 좋다. 그래서 엄마는 큰애가 이기면 놔두고, 작은애가 이기면 말리는 엄마이다. 사실

 

“중립을 지킨다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유리하고 누군가에게는 불리한 것이 중립이다.”

“해 아래 절대 중립은 없다.”

 

교황은 말하기를

 

“고통 앞에서는 절대 중립은 없다.”

 

 

토미 더글라스 캐나다 총리가 연설하면서 한 이야기이다.

토미 더글라스(1904-1986)는 캐나다에 공공의료제도를 도입한 정치가이다. 2004년 위대한 캐나다인으로 선정되었다.

토미 더글라스는 “빨갱이가 나타났다. 잡아 넣얼라.”라고 한다는 것이다.

마우스랜드의 우화를 들었는데, 민주주의 국가에서 투표를 해도 변하지 않는 국민의 고단한 삶을 풍자한 우화이다.

 

마우스 랜드가 있다.

4년마다 선거를 통해 지도자를 뽑는다. 그런데 마우스랜드에서 정치인은 생쥐가 아닌 고양이가 당선되었다. 우리 같은 쥐들이 뭘 알겠어. 그러니까 고양이에게 맡기자. 셍활이 힘들어지니까 바꿔보자.

그래서 검은고양이에 흰 고양이로 바꿔본다. 그래도 힘들 긴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번에는 검은 고양이 반, 흰 고양이 반인 얼룩고양이를 뽑았다. 그랬더니 더 힘들어졌다.

그러던 중 자각한 쥐 한 마리가 나타나서 “그들은 아무리 색이 달라져도 고양이는 고양이일 뿐이ᅟᅡᆮ. 그러니까 이번에는 쥐를 대표로 뽑읍시다.” 라고 말한다.

그랬더니 다른 모든 쥐들이 그 쥐를 향해서 “빨갱이가 나타났다. 잡어 넣어라”고 했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 쥐들은 그 호리병 안에서 고양이가 만들어 낸 생각 속에 빠져 새로운 상상을 하지 못하는 생쥐들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비판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호리병 안에 있던 것들을 좀 바깥으로 물러나서 한번 비판을 해보는 것이다. 상식을 의심하고 비판하는 것 자체가 대안인 것이다.

왜 우리는 200까지 뛸 수 있는데 왜 계속 19배만 뛰고 있을까. 뭐 이런 상상을 해봐야 한다.

비판하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비판을 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상상을 할 수 있는 것들이 비판이다.

그럼 비판을 잘하는 사람은 긍정적입니까. 부정적입니까.

 

또 한 가지는 가난은 나라도 구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인데요.

선 성장 후 분배이다.

 

“콩이 있어야 나눠 먹는 것 아닙니까. 복지요. 그거 다 누구 돈입니까? 낭비에요. 국가 성장 발목잡는 일이라니까요.”

 

분배와 성장 이분법.

 

“그거다 좌파들 얘깁니다. 노동조합이니 시민운동이니 이거 다 빨갱이들이 지껄이는 거예요. 내말이 틀립니까?“

 

과연 그럴까요?

우리 사회의 성장 원동력은 인적자본이다. 양질의 노동력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의 기적은 베이비 붐 세대의 양질의 노동력을 바탕으로 지금까지 성장해 온 것이다.

1940년대 서유럽은 심각한 저출산으로 국가성장의 근본적 위기로 인식하였다. 그래서

 

“아이 낳기 좋은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유럽에서는 복지국가가 탄생합니다. 그 출발점은 저출산 그로 인한 경제성장의 위협에 기원하고 있습니다. 선 복지 후 성장입니다. 성장의 핵심은 인적자원입니다.

그리고 사회적 자본입니다. 사회적 자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입니다. 사회복지는 불평등 완화, 사회 통합을 이끄는 효과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성장보다 먼저 교육부터 시작했던 우리의 부모들이다.

독일의 재상 비스마르크도 영국과 프랑스를 따라잡기 위해서 국가적인 수준의 투자를 시작합니다. 그것은 바로 교육과 의료, 사회보험이었다.

2차대전 이후 영국이 사회 통합과 재건의 목적으로 도입한 것이 사회복지였다. 1920년대 공황에 휩쓸린 미국이 활용한 것도 사회복지였다.

교육, 의료, 주거 등 국가와 사회가 책임질 때 오히려 전체비용이 적게 든다. 그래서 선택한 의무교육과 공공의료이다.

국가와 사회에 가중된 책임은 국가 권력의 정당성을 증대시켰고 국가에 대한 신뢰는 노사갈등과 사회갈등을 감소 시켰다.

줄어든 갈등비용을 인해 오히려 성장이 이어진 것이다. 복지가 투자 전략이다. 선 복지 후 성장 성장전략이다. 사회통합 국가의 정당성이 극대화된다.

왜 한국의 노인세대는 이 멋진 전략을 무시하고 미래를 상상하지 않는 것일까요? 지금부터라도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진지한 토론이 필요하다.

가난은 나라도 구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서유럽은 가난은 나라가 구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투자가 된 것이다.

 

브라질의 롤라대통령은

 

“왜 부자에게 지원하는 것은 투자라고 하면서 시민을 지원하는 것은 낭비라고 하는가? 오히려 일반시민들에 투자하면 양질의 노동력이 생산된다. 그것이 진정한 투자다.”

 

우리나라에서도 놀라운 주장을 한 사람이 있었다.

가난은 나라의 책임이다. 김육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시기의 인물로 ‘대동법’ 시행을 통해 백성 구제 중심의 재정복구를 시도하였다. 조선시댕 내야 했던 세금이 세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땅에 매기는 조세이다. 두 번째는 부역으로 내 노동력으로 내는 세금이다. 세 번째가 지역에 매기는 공납(특산물)이다. 이것을 집집마다 같이 냈다.

그래서 김육은 집집마다 똑같이 내지 말고 그 공납을 쌀로 대신하자. 그리고 그것을 낼 때 토지를 가진 것에 비례해서 내자는 것이다.

즉 대동법은 조선 후기에 공납제를 폐지하고 토지에 비례해서 특산물로 바치던 곡물을 쌀로 통일하여 바치게 한 세금제도이다. 그러다 보니 부자들이 엄청나게 저항했다.

대동법 시행으로 농민들의 부담이 80%가 경감되었다. 지방 호족과 대납, 방납 등이 사라졌다. 그러면서 근대 자본주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런데 양반들의 저항이 심해 100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1608년에 시작해서 1708년에 마무리 되었다. 김육이 죽게 되었을 때 일반 시민들이 너무 고마워 김육의 집으로 갔는데, 김육의 집에서는 우리는 부조를 받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그랬더니 이사람들이 부조금을 모아 기념비를 세웠다. 그 당시 농민들이 세운 기념비 이름이 김공육대동균역만세불망비 이다.

김육이 대동법을 시행해 준 은혜를 만세가 지나도록 잊지 않겠다고 한 기념이다.

그 당시 시민들. 농민들이 굉장히 고맙게 받아들인 것이다. 이와 같이 가난은 나라가 구한다는 사실을 알려준 것이 대동법이다.

 

일본의 아베정권이 내세운 ‘1억 총 활약’ 공약이다. ‘1억 총 활약 플랜’은 50년 후도 인구 1억명을 유지하고 모든 일본인이 더욱 활약할 수 있게 지원하는 정책,

2015년 아베총리가 저출산, 고령화 문제를 극복하고 목표로 내세운 사회플랜이다.

서구 복지국가가 사용했던 ‘동일노동동일임금 정책’, ‘정규직과 비슷한 비정규직 임금’ 정책들을 사용한다. 아베가 1억 총 활약 정책은 전형적인 진보정책이다.

이 정책은 인구전략 등이 수정되지 않으면 일본은 상당히 위기에 빨질 것이라는 생각에서 이다.

즉 1억총활약프로젝트는 저출산 고령화로 노동인구가 감소하면 일본의 근간이 흔들린다는 판단에서 나온 계획이다.

그래서 선복지 후성장 전략이 필요하다. 우리 부모님들은 먼저 교육복지를 하고 성장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즉 선배시민이 어떠한 생각을 갖느냐에 따라 다른 공동체 전략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노인들의 생각은 ① 가난은 나라로 구하지 못한다 ② 정치는 중립적이다. ③ 비판은 부정적이다. ④ 성장이 분배에 우선한다 등의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

비판은 좌파와 우파의 개념이 아닌 더 나은 사회를 향한 열정이자 대안 비판이다.

 

자 그럼 이제부터 호리병에서 나오는 방법을 알아보자.

선생과 학생이 함께 대상을 바라보고 탐구하는 공동 연구자가 된다. 선생님이 기본적으로 옳다라고 전제하지 않는다. 선생님도 단지 하나의 의견일 뿐이다.

노인이 옳다라고 전제하지 않는다. 하나의 의견이라고 생각한다. 선생이 이야기할 때 학생이 듣지만, 학생들이 이야기할 때 선생은 학생이 된다.

 

어르신, 어른신들은 청년들에게 너희들 늙어 봤니. 나는 젋어 봤다. 이렇게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다.

청년들은 어르신한테 무어라고 말하고 싶은지 아세요. 어르신 우리 시대에 젊어 봤어요?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어르신과 청년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프레이리가 말한 것처럼 오늘 꽃을 보았는데, 내일 보는 꽃이 어제 본 꽃이겠느냐 것이다.

내일을 꽃은 싱싱할 수도 있고 시들 수도 있다. 오늘의 시대는 내일의 시대가 아니다. 살아 온 사회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간의 소통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도 아무도 없다.

 

엄마. 나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어. 내 생각은 달라.

네가 뭘 안다고 그래. 조용히 해.

 

나의 생각은 이런데 네 생각은 어떠니?

우리 시대는 이랬는데, 지금 너의 시대는 어떠니. 그러고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소통이 된다. 대화가 매우 중요하다. 

선생들과 학생들이 존재한다. 요즘 우리시대의 100분토론은 토론을 오염시키는 것이다.

 

진정한 토론은 공동성찰이 가능해야 한다.

호리병은 누군가 세상을 만들어 놓고 그 속에서 살게 만들었다. 나는 그 속에서 적응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19배를 뛰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제기식에서는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물으면 어디로 갈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 것은 함께 토론 해보자는 것이다. 모여서 얘기해 봅시다.

세상을 세로 이름지어봐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모델이 선배시민이 가져야 할 태도들이다. 토론하는 동료와 함께 세상을 이름 짓는다.

 

 

프리모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나치 수용소에서 살다가 나왔는데, 의문이 생겼다. 나치가 유대인을 학살했는데 독일 시민들은 그 사실을 몰랐을까? 우린 정말 몰랐다고 말한다. 그런데 정말 몰랐을 수도 있겠더라.

 

그들은 알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대인 학살을 알려하지 않은 이유는 죄책감을 느끼고 공범자가 될까봐서 그랬다는 것이다

 

나치시대의 3가지 불문율

1.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2. 모르는 사람은 질문하지 않고

3. 질문한 사람에게는 대답하지 않는다.

 

이것은 고의적인 태만이었다. 독일시민은 고의적으로 태만했기 때문에 유죄다.

이것이 인간인가하는 책이다.

 

우리는 호리병에서 국민교육을 받고 왔는데

 

자살률 등 OECD 50관왕

 

아는 사람은 말하고

질문한 사람에게는 대답해야 한다.

모르는 사람은 질물해야 한다.

 

의도적 무지를 뛰어넘어 선배시민이 된다는 것, 선배시민의 태도는 자각하고 비판하고, 함께 물으며, 학습하고 근본적으로 실천해야 한다.

자각, 학습, 소통은 공동체의 길을 함께 묻든 것이다.

 

보지 않고 믿는 것, 묻지 않고 믿는 것, 광장이 만들어지지 않고 믿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이것이 문제이다. 물었을 때 그래서 상대방과 나와 의견이 다르다. 그 때 상대의 말에 동의할 수는 없어도 인정할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것이 ABCD의 모델이다. 비판은 누구의 생각을 누구의 생각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생각을 넗혀 나가는 것이다.

틀에 갇힌 병에서 나와 비판하고 소통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상대방의 말에 동의할 수 없어도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

 

 

* 이글은 「No人인가 Know人인가? - 선배시민, 광장을 상상하다」의 유범상 교수의 특강을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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