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범상 교수
선배시민이란 첫째 자각한 사람이다. 늘 나와 나를 둘러싼 공동체의 의미를 묻는 사람이다.
둘째는 학습하는 사람이다. 학습은 혼자가 아닌 함께하는 사람이다. 셋째는 소통이다. 동료들과 후배들과 소통하는 사람이다. 실천하는 사람이다. 불합리한 상황을 바꾸려는 정치적 인간으로서 선배시민, 그 길잡이가 된 사람들의 얘기다.
조지 도슨 미국할아버지 98 세 때까지 글을 읽는 척했다. 간판이랑 암기했다.
98세에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3년 내내 단 3일을 제외하고 새벽 5시 30분에 등교 했던 조지 도슨 할아버지 얘기다. 그리고 102세 때 책을 쓴다.
그 책이 「Life is SO Gold」(인생은 너무 황금빛)이다. 가난한 흑인 가정에서 10형제 중 맏이로 글을 배우지 못한 조지 도슨, 98세 성인교육과정에서 글을 배우기 시작한 인생 이야기를 담은 내용이다.
It’s never too late(너무 늦지 않았네) - 조지 도슨 102세 할아버지
“나는 내가 여기 왜 있는지 알겠네.
나는 배우기 위해 여기에 있고.
나는 다른 사람들이
너무 늦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여기에 있네.
나는 그들에게 이야기 하네.
자존심 때문에
뒤로 물러서지 말라고!“
책을 쓰는 동안 리처드 글로브만과 함께 책을 썼는데, 리처드 글로브만은 신문에 난 도슨 씨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고 싶어 워싱턴에서 뉴올리언스로 날아간 초등학교 교사이다.
그는 할아버지가 살았었던 시절의 신문을 찾아서 할아버지에게 보여준다. 그런데 도슨 할아버지는 그것을 보고 “보이는 건 거짓말, 온통 거짓말뿐이었다. 눈물이 절로 나왔다. 눈에 눈물이 고였다.” 라고 말했다.
할아버지가 살아왔던 시대는 흑인이 차별받던 미국사회였다. 노예같은 삶을 살고 있었는데, 조지 도슨의 젊은 날 떠오른 마샬 형의 기억 때문이었다.
마샬 형의 백인친구가 다른 백인여자와 불장난으로 임신을 시키는 일이 있었는데, 그때 백인여자의 아버지가 추궁을 하자 겁에 질려 마샬을 지목하게 된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백인들의 농간에 동네 형이었던 마샬은 죽임을 당하였던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당시의 신문을 글을 알고 나서 직접 읽어보니 신문내용이 온통 거짓말뿐이었고, 나는 눈물이 났다라고 회고한 내용이다. 그래서 나는 살아야 한다. 나 같은 사람이 그것을 증언해야 한다고 말한다.
선배시민의 조건은 자각하고, 학습하고, 소통하는 것인데, 그 후에는 문해학교에 사람들이 넘쳐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재미있는 일은 90세 할아버지도 그 내용을 본다. 이 할아버지는 어부였고, 선장이었다. 이 할아버지도 90세가 될 때까지 글을 모른다.
제임스 아루다 헨리(James Arruda Henry)는 포르투칼 태생의 미국인 바닷가재 조업 선장이었다. 음식점에 가면 글을 모르니 시킬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음식점에 갈 때 마다 옆사람이 먹고 있는 것을 주문해서 먹었다. 그런데 식구들도 모두 글을 몰랐던 모양이다. 그런데 조지 도슨이 98살 때 글을 배우고 102살 때 책을 썼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내가 못할 게 뭐 있느냐면서 글을 배운다.
그리고 98세 때 책을 쓴다. 그의 책이 「In A Fisherman’s Language」(어부의 노래)로 98세 헨리 할아버지가 쓴 자전적 수필집이다.
평생을 바다에서 살아온 이야기를 담았다. 헨리 할아버지는 이 책을 쓰면서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다는 내용이다.
선배시민은 자각, 학습, 소통이다. 이 두 할아버지들은 상당히 평범한 분들이었다. 그런데 자각을 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을 대표한 선배시민은 누구일까?
경기도 이천의 90대 할머니이다. 50년 동안 나를 모르고 살았다. 세상도 모르고 살았다.
할머니는 그제야 나는 누구인가,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싶은 열망이 돋아나기 시작한 박종옥 할머니 얘기다.
그러던 중 이천시 노인복지관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일들을 취미여가 프로그램을 통해 시작하였다.
“오늘은 자신에게 감사하고 모두에게 감사하는 긍정심리 행복나눔 프로그램을 배웠다. 그리고 박수치면서 웃음 나누기를 배웠고, 아름다운 나를 뒤돌아 봤습니다.
그런데 아름다운 나를 여러 시동생들과 자녀들을 다 키워서 시집보내고 장가보내고 심한 고통 속에서 그 모든 일을 묵묵히 다 했던 내 자신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 후 공연봉사단의 일원으로 공연봉사도 하였다. 그러던 중 할머니는 선배시민대학에 들어가 다른 삶을 걷기 시작한 박종옥 할머니이다.
선배시민의 오랜 지혜가 후배시민의 삶에 길을 밝혀 줄 수 있는 노인의 지혜가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지금 할머니는 선배시민대학의 동료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복지관에서 진정한 나를 찾고자 했던 박종옥 할머니였다.
“나를 복지관에 좀 보내주면 우울증이 치료가 될 것 같아요.”
그랬더니 할아버지가 10년만 복지관에 나가시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참여하게 된 것이다. 놀라운 것은 10년 동안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선배시민대학에서 활동을 했다. 10년이 되어서 할아버지가 ‘10년이 되었으니 나가지 말라’고 말하자, 할머니는 ‘지금 복지관에 못 나가면 옛날처럼 우울증이 도질 거예요’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럼 ‘월, 수, 금만 나가시오’라고 해서 타협을 했다고 한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가부장머리 남편’이라고 말했다. 그 후에 할머니는 ‘나는 여지껏 봉사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봉사활동 방향 등 선배시민의 길을 자각하고 학습’하기 시작하였다. 한 할머니가 시간이 없고 몸이 약해서 모임은 힘들다고 이야기 하면, “너 나보다 나이 많아?” 그러면서 이천에서 ‘다문화 아동들의 가정봉사활동’ 조직을 만들었다.
조지도슨, 헨리, 박종옥할머니 같은 사람들이 도처에 존재하는 선배시민들이다. 나이를 떠나 자각, 학습, 소통하면 걸을 수 있는 선배시민의 길이 있다. 그 후 강의 받은 사람들에게 여운을 남겼던 박종욱 할머니의 인생이야기이다. 또 한사람은 타게 에를란데르(Tage Erlander)이다.
“물론 우리는 성장할 것이다. 그러나 다 함께 성장 할 것이다”
타게 에를란데르(1901-1985)는 스웨덴 정치인이다. 45세에 총리가 되어 23년 동안 재임하며, 스웨덴 복지의 상징인 ‘국민의 집’을 완성하였다. 타게 에를란데르는 시민으로서 존중을 받을 수 있는 국가 ‘국민의 집’을 만들어야 되는데, 그러려면 세금이나 재정정책 등을 바꿔야 되면서 “너는 왜 세금을 많이 걷나?‘라고 질문을 받게 된다. 그러면 이렇게 대답했다는 것이다.
“내가 시민들의 세금을 걷어 시민들을 가난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모두를 부유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면서 국민의 집을 완성하기 위해 에를란데르 총리가 했던 수많은 소통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소통과정 중 하나는 “목요클럽(Thursday Club)”이다. 목요일마다 사람들을 만난다. 에를란데르는 총리를 23년간 했다. 그런데 23년 총리 재임 내내 목요일마다 사람들을 만났던 에를란데르 이다. 그래서 ‘목요클럽’이 되었다.
“나는 목요일이 좀 한가한데, 아예 매주 저녁을 먹읍시다.”
그래서 23년 동안 만났다. 매주 목요일 재계의 인사와 노조 대표 등 이해관계자들을 초청해 소통의 기회를 주선하였다. 그렇게 사람들을 만났음에도 사람을 다 만나지 못하니까 휴가 때도 시민을 직접 만나 소통을 했다. 어느 날 스웨덴 한 대학에서 한 젊은이가 질문을 한다.
“에를란데르 총리, 나는 당신에 대한 평가가 다르다. 당신은 우리를 성장시켰다고 얘기하는데, 그렇지 않다. 나는 당신을 실패한 총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총리는 자신을 비판했던 청년을 자신의 비서로 채용하였다. 그러면서
“총리에게 저렇게 용기있게 이야기 할 정도라면 무엇이든 제안하여 토론이 가능할거라 생각한다.”
라고 말한다. 이때 문제 제기했던 청년이 ‘팔메’라는 청년이었다. 그리고 비서로 채용되었던 ‘팔메’가 그 다음 수상이 된다. 올로프 팔메(Olof Palme, 1927-1986)는 스웨덴의 사민당 소속의 정치가이며 두 차례 총리를 역임하였으며, 스웨덴의 보편적 복지정책을 발전시키는데 기여한 총리이다.
팔메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모두 정치가이다. 자기의 생각을 표현하면서 세상을 다 바꿀 수 있다.”
우리가 스웨덴의 복지국가는 에를란데르 총리와 팔메 총리를 거치면서 복지국가가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스웨덴의 총리들은 소통을 하려고 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세금이나 재정의 문제를 시민들과 소통을 통해 동의를 얻어 정책을 추진하였다.
에를란데르는 1968년 스웨덴 선거에서 사민당이 가장 압도적으로 승리한 선거이다. 그럼에도 자진 사퇴한 에를란데르 총리이다.
그리고 떠났는데 집이 없었다는 일화가 있다. 집이 없는 에를란데르를 위해 시민들이 집을 선물하였다. 그 집을 국민의 선물이라고 한다.
총리 사망 후에 그의 부인이 볼펜 하나까지 국민의 재산이었다며 국가에 환원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우리가 여기에서 배울 수 있는 점은 소통과 토론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하지 않았겠느냐 하는 것이다.
또 한 사람은 시민들과 함께 세상을 바꾸려 했던 선배시민이 있다.
1930년대 하이랜더 지역에 시민학교를 세워 미국 시민권 운동을 이끌었던 교육운동가 마일스 호튼이다.
1950년대 빈민의 실상을 접한 뒤 변호사를 그만두고 정치적 문해교육 방법을 개발, 군사정권의 탄압으로 망명생활을 하며 정치적 문맹퇴치를 위해 살아온 실천가, 사상가 파울로 프레이리가 있다.
20세기 교육으로 세상의 변화를 꿈꾼 마일스 호튼과 파울로 프레이리가 있다.
1987년 겨울 테네시주 하이랜더 언던 두 실천가가 만났고 이야기가 시작됐다.
프레이리는
“제 생각과 사상은 계속 변해왔고 지금도 변하고 있습니다. 생각이라는 건 계속 변해야 한다고 전 믿습니다.”
호튼은 “전 사람은 자신 안에 갇혀 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프레이리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경계해야 할 것은 마음의 관료화입니다.” “인간으로 살아가는 최선의 방식은 우리가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탐구해야 하고 그러지 않으면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나 매 한가지죠.”
호튼 “하이랜더 초기에 중요한 두 가지 원칙을 세웠습니다. 하나는 함께 일하는 시민에게 배워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서로서로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시민에게 배우고자 했던 많은 것을 배웠고 이것이 진정한 하이랜더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변화가 이루어진 것이죠.”
프레이리
“저도 그런 태도를 지지합니다. 그런데 초기에 그것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저는 초기에 시민에게 다가가서 그들에게 말을 했어요. 하지만 그들과 함께 이야기 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자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느 대화에서 저는 시민에게 다가가서 그들에게 말을 했어요.
하지만 함께 이야기하지는 않았죠.
바로 그날 아내 엘사가 말했어요. ‘어때요 잘 안되었지요?’ 잘 안됐어. 왜 그럴까? 나는 정말 진지했는데...
‘당신이 한 말은 모두 옳은 말이었어요.
하지만 그들에게 당신이 하는 말에 관심이 있는지 물어보지 않았죠. 결국 당신이 질문하고 답한 꼴이 된 거죠.’ 저는 그 때 깨달았습니다.
민중을 존중하지 않으면 그 어느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죠. 훌륭한 교사란 놀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나쁜 일은 더 이상 놀랄 일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갑자기 꽃 한 송이 때문에 놀랄 수 있어요. 그렇다면 내일 그 꽃은 오늘 내가 보고 놀란 그 꽃과 같은 꽃일까요?
그 꽃은 엄연히 다른 빛깔을 가진 새로운 꽃입니다. 꽃도 매일 나이를 먹으니까요.”
“지도자는 민중의 열정과 꿈을 번역해 내는 사람이 되어야지 그 꿈을 만드는 사람이 돼서는 안 됩니다.
교육자가 민중을 만들기도 하지만, 민중에 의해 교육자가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요”
“그 것이 교육자의 품위가 아닐까요?”
호튼과 프레이리는 인간의 진정한 해방은 토론하는 동료들과 함께 대화, 학습, 그리고 참여를 통해 만들어 진다고 믿었다.
“그들이 걸어간 곳은 곧 길이 되었다.”
외부 특강을 하면서 졸지 말라고 한다. 그런데 정작 강연을 듣는 사람들은 말한다. “우리에게 어떤 강의를 듣고 싶은지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어요.”라고 말한다.
학교는 학생에게 이야기 했을 뿐 학생과 함께 이야기 하지 않았던 강연이 된 셈이다.
호튼과 프레이리는 시민과 함께 이야기하는 공간을 만들었던 선배시민들이었다.
마일스 호튼(Myles Horton, 1905-1990)은 미국의 시민권운동과 지역사회학교운동을 이끈 실천가로 ‘하이랜더’ 시민학교를 설립해 많은 민중 교육자 및 활동가를 배출하였다.
파울로 프레이리(Paulo Freire, 1921-1997)는 전 세계를 돌며 문맹퇴치 교육에 앞장 선 브라질의 교육자로 20세기 대표적 교육 사상가이다.
두사람은 1987년 하이랜드 지역학교 학회에서 마일스 호튼과 파울로 프레이리가 만나게 된다.
위 대화는 「우리가 걸어가면 길이 됩니다.」 마일스 호튼 & 파울로 프레이리 저서이다. 교육학과 사회를 비판한다. 시민행동의 의미에 대한 통찰을 대화로 담았다.
호튼은 하이랜더 지역학교를 만들었다. 토론할 수 있는 광장인 학교를 만들어 시민들과 함께한 마일스 호튼이다.
하일랜더 학교의 최초의 교사는 하이랜더 학교에서 배우고 깨달은 학생이다. 이 말은 시민이 시민과 함께 열린 공간에서 토론하는 것이 하나의 교육이라는 것이다.
이 학교에서 나온 사람이 로자 파크소(RosaLeeLouse McCauley Parks, 1913-2005)는 미국의 흑인 민권운동을 이끈 시민권 운동가이다. 이후 미국 의회에 의해 ‘현대 시민권 운동의 어머니’로 불리고 있다.
당시에는 ‘분리에 관한법’에 의해 백인과 유색인이 동석할 수 없었던 미국사회였다. 로자 파크소는 1955년 버스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아 체포당한다.
로자 파크스의 버스 사건은 흑인들의 동의를 얻어 400일 이상 걸으며 인종차별에 저항을 한다. 1956년, 버스에서의 인종 분리정책은 위헌이라는 연방 대법원의 판결을 이끌어 낸다.
로자 파크스가 다녔던 학교가 하이랜더지역학교(Highlander Folk School)였다.
프레이리는 은행저축식 교육과 문제제기식 방식의 교육이 있다.
은행저축식 교육은 선생이 학생의 머리 속에 책을 집어 넣어 주는 주입식 교육방식이다. 은행저축식 교육은 정보나 지식을 저금통에 입금시키는 교육이다.
교사가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달하는 교육이다. 문제제기식 교육은 우리 돌아가면서 이야기 해보자. 서로가 서로의 생각하는 문제를 이야기해 보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사회를 이해하고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문제제기식 교육은 교사와 학생이 수평적 관계에서 공동의 탐구자가 되어 함께 토론하고 문제를 해결해 가는 교육방식이다.
그럼 우리나라에는 박종옥 할머니처럼 선배시민의 사례를 찾아보자.
그 중 한국의 대표 지식인 중에서 기억할 선배시민은 공병우 박사이다. 공병우 박사하면 떠오르는 것은 단지 한글타자기인데, 최초의 안과 의사로도 익숙한 공병우 박사이다. 공안과이다.
그리고 의사인데 어째서 타자기를 만들었을까. 그런데 이분이 선배시민이라고 할 만한 놀라운 것들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안과의사 공병우박사가 있다. 대한민국 최초 안과 병원 공안과를 개원하였다. 대한민국 최초 쌍꺼풀 수술이 있었다.
대한민국 최초 콘택트렌즈도 도입하였다. 많은 세금을 낼 정도로 부를 쌓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돈버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관심은 세상이 자신의 지식을 사용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극로(1893-1978)는 “우리 민족이 갖고 있는 한글에 대해 관심을 가져 본 일이 있습니까?”
공병우(1907-1995)는 “아직 없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의사 검정시험에 필요한 일본글만 공부했습니다.”
이극로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언문이란 글은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훌륭한 글인데, 일본 놈들이 이 글을 못 쓰도록 탄압하고 있죠.
아니 일본놈들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조선 사람들까지 제나라 글에 대해 대체로 무관심한 편이에요”
“아니 한술 더 떠 아예 한글은 글자가 아닌 것인 양 무시하는 식자들이 많습니다. 통탄할 일이죠.”
공병우는 눈병 고치는 일은 외국인도 할 수 있지만, 한글의 과학화는 한국인이 해야하는 거라고 생각하였다.
“그래 내가 하자 우리 한글이 얼마나 과학적이고 우수한지 알리자”
그 이후 시작된 우리 한글의 셰계화에 노력하기 시작하였다. 한글 기계가 자꾸 나오면 한글을 사랑하겠지. 사람들은 말했다.
“저 사람 한글타자기를 개발한데, 미친거 아냐?”
공병우는 그래서 1974년 한글타자기가 개발하였다. 한글타자기를 통해 사람들이 편리한 삶을 누리는 길을 열었다. 그러나 그의 도전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1990년대 한글 문화원을 설립하고 그곳에서 좀 더 편하게 한글자판을 사용하도록 연구했다. 그 결과 지금 누구나 사용하는 <아레아 한글>이 탄생하게 되었다.
공병우 박사는 ‘한글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친 선배시민’이다. 구급차를 수입해 전국을 돌며 무료진료도 하였다. 한국 맹인 재활센터에서 점자와 한글타자기 치는 방법도 가르쳤다.
“선생님. 이제는 좀 쉬고 여생을 편안하게 보내세요.”
“진정으로 푹 쉬는 날은 지금이 아니라 죽은 다음에도 충분합니다. 남은 생애를 사회에 뭔가 조금이라도 되돌려 주는 일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너그럽고 사회에 환원하는 마음으로 살았지만, 자신에게는 끝없이 인색했던 사람, 공병우박사이다.
“나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지 마라. 장례식도 치르지 마라. 쓸만 한 장기는 모두 기증하고 시신은 대학에 실습용으로 기증하라! 유산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복지를 위해 써라!”
유족들은 뜻에 따라
각막은 다른 사람에게 이식하였으며, 시신은 의과대학에 실습용을 기증하였다. 빈소도 장례식도 묘지도 없었다. 아주 놀라운 분이다. 80세가 되어서도 한글의 대중화와 과학화에 힘썼던 공병우 박사이다.
시대에 맞는 한글의 실용화를 위해 직접 연구하고 지원했던 인물이다. 공병우박사는 일제 때 한글의 우수성을 깨달으면서 창씨개명도 거부하였다.
이제 부터는 공병우라는 사람은 죽은 것이다. 공병우 박사는 ‘한글 과학화는 한국인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내 공간에서 나 다운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후배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았던 선배시민이다.
아흔을 넘어 글을 배우고 책을 낸 도슨과 헨리 할아버지.
70세가 넘어 세상으로 나와 봉사의 길을 걷는 박종옥 할머니.
스웨덴 복지 <국민의 집>을 완성한 에를란데르와 팔메 총리.
시민교육 실천가로 억압 받는 세상을 바로 잡았던 호튼과 프레이리.
한글의 대중화와 과학화를 이끈 공병우 박사.
이들은 앞서간 선배시민이었고 이들과 함께한 많은 사람들이 선배시민이 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노후에 어떤 노인이 될 것인가?
나는 어떤 선배시민이 될 건가?
선배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자각해야 한다. 스스로 깨달음이다. 순응하며 살았던 박종옥 할머니가 자각을 통해 공동체에 참여하게 된다.
로자 파크스도 그냥 흑인이고 주어진 질서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각을 통해 불합리한 차별에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선배시민의 첫 번째 조건이 자각이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사회문제의 자각은 학습과 함께 이뤄지고 주변에 토론하는 동료가 있었다는 것이다.
도슨할아버지는
“만약에 그 시민학교가 만든 전단지를 놓고 갔으면 어떻게 할 뻔 했느냐. 다행인 것은 그 전단지를 들고 온 사람을 내가 만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 학교를 가게 되었고 자각하게 된 것이다.
타게 에를란데르 총리도 그 사람이 그 사람다워 졌던 것은 토론장에 나왔던 시민들이 있었기에 추앙받게 된 것이다.
스웨덴은 ‘스터디 써클 포 데모크라시’ 즉 학습동아리 민주주의에 성인인구의 60%가 참여하고 있다. 그러니까 총리를 만나 토론이 가능했던 것이고, 총리를 이를 기반으로 정책을 펼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프레이리와 호튼은 토론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는 시민사회에 직접 들어갔던 것이다.
<페다고지>는 영어로 읽으면 교육학인데 pedagogy for the people이 아니라 pedagogy of the opressed 라고 부른다. 그래서 선배시민이 되기 위해 함께하는 학습이 중요하다.
내 주변에 함께 학습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통이다.
소통의 전제는 너와 나하고 우열의 관계가 아닌 차이에 대한 존중과 인정을 하는 것이 소통이다. 과거 대한민국은 함께 토론하는 것을 꿈꾸기 힘든 가부장적 사회였다.
당신은 어떠한 선배시민이 되고 싶은가?
이 질문에 대해서 함께 생각하는 것이 ‘평범한 사람들이 도처에서 어떻게 선배시민이 될 것인가?’하는 것들이다. 평범한 사람도 선배시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원리를 찾아가는 여정이었던 시간이었다.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1950)는 영국의 극작가 겸 소설가이자 비평가이다.
최대 걸작인 <인간과 초인>을 써서 세계적인 극작가가 되었다. 그런데 그 사람의 묘비명에는 “우물쭈물 하다가 내 그럴줄 알았다.”
ㅎㅎㅎ 선배시민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지금부터 고민해보면 좋겠다. 선배시민의 길은 평범한 사람들이 자각하고 소통할 때 만들어진다.
* 이 글은 공감특강 「No人인가, Know人인가? - 선배시민의 길을 낸 사람들」 유범상 교수의 특강내용을 요약한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