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배고프지 않는 공동체

by admin posted Jan 05,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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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부를 권리는 없을지라도 배고프지 않을 권리는 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위험에 직면한다.

대부분의 동물들이 태어나서 몇 시간 만에 걸을 수 있는 것과 달리, 인간은 자립하는 데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인간은 가장 오랫동안 돌봄이 필요한 동물이다.

 

성인이 되면 괜찮을까?

취업을 해야하고,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아 키우기도 한다. 어느덧 인간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노년에 도달한다.

출생에서 죽음까지 인생의 여정에서 인간은 수많은 위험과 맞닥뜨린다. 실직 상태에 있을 수도 있고, 몸이 아플 수 있고, 사고로 장애가 생길 수도 있다.

노인이 되면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노인은 모든 위험에 노출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평등한 세상 속에서 경제적 위기를 헤쳐나가야 하는 가족이 노인의 위험까지 해소하기는 벅차다.

결국 노년의 인간이 품위를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연대성에 기반한 공동체가 나서야 한다.

그런데 한국의 노인들은 이 위험을 온몸으로 겪어내며 살고 있는 듯하다. 국가가 이들을 방치해 왔기 때문이다.

산업화시대에 국가는 민족중흥을 위한 헌신만을 강요했다. 돈은 가족은 생계를 위해 다썼다. 민주화 이후 사회보험제도가 도입되었지만 이들은 수혜 대상이 아니었다.

거기에다 저성장시대에 들어섬에 따라 믿었던 자식들마저 노인을 돌볼 여력을 상실했다. 산업화시대를 산 노인들은 방치되고 있다.

민주화시대의 주역들이 노인세대로 진입하고 있지만, 이들에게 사회보험은 ‘용돈수준’에 불과하다. 물가, 집값, 생필품 비용 등의 높은 생활비를 감안하면 이들도 안전하지 못하다.

인간에게 배부를 권리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 배고프지 않을 권리는 있다.

베버리지는 복지국가가 맞서야 할 첫 번째 惡으로 결핍(want)을 꼽았다.

결핍은 인간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다. 시민은 배고프지 않고 수명대로 살 권리가 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노인들은 배가 고프다.

“노인 2명 중 1명은 빈곤하고, 3명 중 1명은 생활고로 과로한다.” <과로노인>의 한 구절이다.

이책의 저자 후지타 다카노리는 빈곤한 노인을 ‘하류노인’으로, 일하는 노인을 ‘과로노인’으로표현한다. 오늘날 일본의 현실이다.

하류노인은 수입, 저축, 의지할 사람 등 세 가지가 없는 상태의 노인을 의미한다. 이 부류의 노인은 연금수급액과 저축이 적고 고령으로 인한 질병 및 사고 등으로 빈곤한 삶을 살고 있다.

일본의 하류노인 현상은 한국에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노인 빈곤율이 45% 전후이다. 노인 불평등은 다른 연령층에 비해 훨씬 심각한 상황이다.

고급 요양시설에서 노후를 즐기며 100세를 사는 노인이 있는가 하면, 쪽방에서 고독사 하는 노인이 존재한다. 이런 상황에서 노인들은 어쩔 수 없이 일한다.

 

“취업자는 60-64세가 58.8%, 65-69세가 45.9%, 70세 이상이 21.0%로 38.7%의 고령자가 일하고 있다.

현재 한국은 고령자가 되어도 일하는 상황이 보통이 되었다.”(통계청)

 

노인 은 '고다자"이다

노인들의 일자리는 고르기 쉽고, 다루기 쉽고, 자르기 쉬운 일명 ‘고다자’이다(조정진, 임계장이야기).

왜 그럴까? 노인은 신체나 능력면에서 경쟁력이 없다. 그래서 청년도 힘들어서 기피하는 곳으로 몰린다.

 

“이런 험한 직종은 젊은 사람들이 지원하지 않는다. 지원하더라도 2, 3일 하다가 견디지 못하고 나가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젊은이들이 견뎌내지 못하는 일과 기피하는 일은 고령자의 차지가 된다.”(후지타)

 

노인들은 어떻게 이 일을 견뎌낼까?

결딜 만해서가 아니다. 견디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다.

노인들은 박스 줍기, 경비원, 요양사 등 저임금 장시간 임시직의 일자리에 종사한다. 하지만 일의 대가는 겨우 생존비에 불과하다.

한국의 노인 노동자는 말한다.

 

“사회적 약자들도 인간적 품위를 보장받는 나라라는 구절이 가슴에 박혔다.

그러나 내가 인간적 품위까지 바란 건 아니었다. 최소한 생계비를 벌 수 있는 나라를 원했을 뿐이다.” (조정진)

 

현재 한국의 사회보장제도는 취약하다.

1988년에 도입된 국민연금은 첫째, 역사가 짧아 전체노인의 40% 미만이 수령하고 있고, 둘째, 이전소득대체율이 40%에 불과하다.

이것은 국민연금 가입자가 40년 동안 성실히 보험료를 납입하였을 때 수치이며, 2017년 기준으로 평균가입기간 17년에 받을 수 있는 실질소득대체율은 24%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김정현)

그러나 국민연금 수급연령은 65세까지 늦춰졌다. 용돈 수준의 연금을 받으려면 은퇴 후 몇 년 더 기다려야 한다.

 

우리는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이반 일리치’가 말한 ‘현대화된 가난, 즉 플러그처럼 시장에 꽂혀 평생을 생존이라는 감옥 속에 살고 있다.

감옥에 갇힌 인간은 개인의 재능, 공동체의 풍요 그리고 환경자원을 자율적으로 사용하지 못한다(일리치). 특히 노인은 가난의 감옥에서 살아 갈 가능성이 높은 부류이다.

 

노년의 빈곤이 개인의 노력 부족 탓이 아니라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상황 때문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과로노인>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하류노인이 되지 않는 방법은 없다. 그렇다면 ‘하류노인’을 만들지 않는 사회를 위해 우리가 다함께 손을 잡아야 한지 않을까.”(후지타)

 

문제 해결의 열쇠는 사례관리에 있지 않다.

시민의 집을 가능하게 한 사회 관리 전략에서 찾아야 한다. 개인과 가족이 아니라 공적인 대응, 즉 사회보장제도에 답이 있다.

 

 

(유범상·유해숙저, 선배시민 – 시민으로 당당하게 늙어가기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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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2020년 OECD 주요국가 노인취업률(65세기준)

프랑스 3.3%, 이탈리아 5.0%, 독일 7.4%, 영국 10.5%, 캐나다 12.8%, 미국 18%, 일본 25.1%, 한국 3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