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시민, 후배시민을 품다(7)

by admin posted Dec 27,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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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범상 교수

 

노인은 지혜도 있고, 경험도 많고, 역사도 있고, 다양한 삶도 있고, 그런데 사람도 아니라고 한다.

그 동안 선배시민에 대한 인식론, 방법과 실천을 이야기해왔다. 그리고 늙은이에서 선배시민으로 거듭나는 것을 이야기하였다.

 

그럼 노인이 선배시민으로 자각하고 난 다음에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때 그 첫 번째 일은 후배시민을 품는 일이다. 늙은이에서 선배시민으로 되었다는 것은 돌봄의 대상에서 돌봄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선배시민은 공동체를 돌보는 사람, 후배시민을 돌보는 사람이다. 그래서 오늘의 주제는 ‘선배시민, 후배시민을 품다’ 라는 주제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후배시민을 품기 위해서는 지금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고,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들에 대한 이해, 즉 후배시민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 하다.

그럼 먼저 후배시민의 오늘을 보자.

 

헬(Hell) 조선, 한국은 지옥같은 나라이다.

Hell 대한민국이라고 왜 하지 않았을까? 조선을 붙인 이유는 현재 한국이 조선시대처럼 신분제 사회라는 의미가 아닐까. 대한민국은 신분사회가 유지되고 있으니까 헬 조선이라고 한 것 아닌가?라고 생각된다. 민주화가 되었고, 계층이동이 가능하다고 하는데 실질적으로는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시대가 달라졌지만 계층이동이 불가능한 사회라는 젊은이들의 생각이다. 젊은이들이 생각하는 한국은 헬조선, 죽음의 땅 희망이 없는 땅이라는 얘기다. 흑수저는 영원히 흑수저다.

 

대한민국은 키클롭스 괴물이 되어버린 대한민국이 아닌가?
키클롭스는 그리스 로마신화에 나오는 정수리에 눈이 하나만 있는 거인 족이다. 그 눈은 항상 효율과 성장의 눈으로만 보고 무한 질주하는 한국( 한 번도 뒤돌아 보려하지 않는다)을 의미한다. 대한민국이 이런 괴물에 사로잡혀있고, 푸르크루스테스 침대에 사로잡혀있는 것 같다. 프로크루스테스(Procrustes) 산적은 나그네를 유인해 침대길이보다 길면 절단하고 작으면 늘려 죽인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산적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퀴클롭스 괴물에 사로잡혀 있는 프로쿠루스테스 침대위에 있는 사람들과 같다. 그래서 우리는 맞춰야 하는데, 맞추지 못한 사람들한테는 체념과 굴욕이 따른다. 오늘날 20, 30세대는 나는 N포 세대라고 한다. 결혼을 포기한 경우가 56.8%, 꿈과 희망을 포기한 경우가 56.6%다. 내집마련 포기 52.6%, 연애포기 46.5%, 출산포기 41.1%이다. 사회에 맞추지 못한 N포세대가 겪는 체념과 굴욕을 경험하게 된다. 생리대와 관련된 슬픈 얘기들이 있다. 맞추지 못한 사람들이 느끼는 비애와 고통, 굴욕이 많은 사회이다.

 

휴거의 원래의 뜻 : 예수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하여 재림할 때 구원받는 사람을 공중으로 들어 올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의미가 아니다. 여기에서 휴거는 휴먼시아(임대아파트)에 사는 거지들의 합성어이다. 이 것을 누가 부모님들이 가르쳤다. 맞추지 못한 사람들이 당하는 굴욕감을 말한다.

 

맞추려는 사람은 병목을 지나 소수만 간다. 병의 목 부분처럼 넓은 길이 갑자기 좁아짐으로써 일어나는 교통체증현상을 말하는데, 우리사회가 병목현상이 생긴다.

 

이러한 병목현상을 뚫는 것은 공평하지가 않다. 자녀의 자기소개서나 스펙을 만들어 주는 것이 부모이다. 대학생이 졸업을 할 때 빚을 지고 나온다. 아르바이트와 빚을 진 대학생은 정규직 취업률이 저조하다. 대학생들은 모두 프로크루스테스 침대에 맞추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맞추기가 쉽지 않다. 그러다가 맞춘 사람이 있다. 그렇게 맞춘 사람은 중독조직과 동반중독이 된다. 퀴클롭스 괴물에 맞춘 사람들은 이윤에 따라 무한질주를 하게 된다. 중독조직은 인간을 인간으로 보는 게 아니라 이윤을 창출하는 상품으로 보게 된다. 그래서 프레이리는 그런 사람들을 네크로필리아적인 사회가 되었다고 말한다. 네크로필리아는 시체를 사랑하는 사람, 사람을 이윤창출의 도구로 인식하는 사회이다. 기업은 사람을 뽑을 때 이 사람이 나에게 얼마만큼 이윤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를 보고 뽑는다. 중도고직에 중독이 되면 모든 것이 상품으로 전락한다. 그래서 사람들도 상픔으로 보인다는 의미에서 네크로필리아 사회가 된다.

 

교육기획관이 놀라운 발언을 한다.

민중들은 개돼지다. 스크린 사망 노동자에게는 우리가 솔직히 그의 죽음에 공감할 수 있는가. 나의 일이 아닌데. 장학재단 이사장의 놀라운 발언도 놀랍다.
“학생들이 일정한 정도의 있어야 파이팅을 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회에 맞출 수 없을 때에는 할 수 있는 일은 저항이다. 그런데 저항하면 보복을 당한다.

에드워드 스노우든 내부고발사건 : 전국가안보국(NSA) 직원으로 미국의 광대한 감시체계를 폭로하고 러시아로 망명한 스노우든이다. 정의를 묻고 러시아로 망명가야 했다.

베테랑은 탱크로리 회사의 노동조합을 만들었는데, 모두 다 파괴하고 마지막에 노동조합 위원장만 남았다. 그리고 회사에 들어갔더니 재벌 3세가 화물노동자를 야구 방망이로 폭행하고 맷 값으로 2천만원을 지급한 사건을 영화로 만든 것이 베테랑이다. 딸이 언론에 알리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저항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 때 때린 사람은 집행유예를 받았다.

 

지금 후배시민들은 이런 사회에 살고 있다. 사회에 잘 맞추지도 못하고, 저항 할 수도 없는 후배시민들이다. 우리는 후배시민들이 이러한 상황에 있다는 것을 먼저 자각해야 한다. 선배시민이 후배시민을 품을 때 첫 번째 필요한 것이 ‘자각’이다. 즉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Hell 조선을 자각해야 하는 것이다. 단체의 신곡에 보면 지옥문이 있다.

그 지옥문에는 “여기서부터는 모든 희망을 버리시오”라고 적혀있다고 한다.

 

2014년 송파 세모녀가 자살했을 때 힘들어서가 아니다. 더 이상 희망이 없었기 때문이다. 희망이 없기 때문에 죽은 것이 Hell 조선이다. 송파 세모녀 자살사건은 2014년 서울 송파구 지하방에서 살던 세 모녀가 생활고로 동반 자살한 사건이다. 우리사회는 젊은이가 노력해도 안 되는 나라, 희망이 없는 땅 - 헬 조선이 되어있다.

우리가 자각한다는 것은 무엇을 자각한다는 것인가? 선배시민은 자각을 통해 공감하는 것을 선택한다. 자각하는데 연민과 공감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할까?

수잔손택은 그의 저서 「타인의 고통」에서 고통을 담은 이미지들이 사용되는 방식과 의미는 물론이고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방식’에 대해 문제 제기한다

 

엄마가 ‘아프리카 아이는 꼭 도와줘야 한다. 이것이 인간의 도리다’ ‘그러니까 너는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 이렇게 말을 하는데, 아프리카 아이와 자매결연을 통해 엄마가 가르쳐준 것은 동정이다. 또 한가지는 ‘안도감’이다, 힘든 사람들을 도우며 드는 감정은 동정과 안도감이다. 나는 아니구나 그런 감정이다. 이것이 연민이다. 연민은 동정과 안도감을 포함하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공감은 무엇인가?

공감은 저 현상들이 왜 저렇게 발생하였을까? 현상들이 왜 발생되었을까? 아동수당이 있었다면, 의료가 공공의료가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사회현상을 고민하고 대안을 생각하는 거시 공감이다. 오늘은 내가 아니어도 내일은 나일 수 도 있다는 생각을 갖는 것이다. 위험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하는 것이 공감이다. 공감은 분노와 연대를 포함하는 의미이다. 왜 나의 일이니까. 남의 일이 아니니까 그렇다. 공감은 세월호의 참사가 나의 우리의 문제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또한 연민은 text만 본다. 아프리카의 아이만 본다. 죽은 스크린 도어 노동자만 본다. 세원호의 죽은 아이들만 본다. 그러니까 애도하고 슬퍼한 다음에는 이제 그만하자고 한다. 왜 부모님이 죽어도 49제면 끝나는데, 왜 남의 아이가 죽었는데 2년을 끌고 있지요? 라고 한다. 이와 같이 말하는 분은 세월호 참사를 통해 연민을 느낀 사람이다. 공감은 세월호 참사가 나와 우리의 문제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즉 나의 문제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공감하는 것이다. 즉 context를 보는 것이다. 공감의 관찰은 구조와 권력관계를 들여다본다. 그런데 연민의 관찰은 text, 개인, 슬픔만을 본다.

 

그러다 보니 연민은 타인과 나와의 관계에서 나와 타인은 서로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공감은 나와 타인은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교육기획관은 ‘ 노동자의 죽음’을 보고서도 그의 죽음이 내 아이와 어떻게 같느냐? ‘노동자의 죽음이 내 자식 일처럼 생각된다고 말하는 건 위선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연민이기 때문이다. 공감은 오늘은 내가 아닐 수 있지만 내일은 나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갖는 것이다.

 

대응방식도 다르다. 연민은 나 혼자서 슬퍼하고 우울증이나 불면증에 걸린다. 공감하는 것은 함께 모여서 토론하고 고민하는 것이다. 그런데 선배시민이 된다는 것은 연민을 넘어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세월호 유가족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우리를 동정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세월호 부모는 구조적 문제를 제기히고 재발방지를 위해 싸우는데 연민의 눈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애들이 죽었으니 저럴 만도 하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유가족들은 괴롭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제 그만 좀 하자’라고 하는 것도 유가족을 힘들게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세월호 유가족을 가장 아프게 하고 굴욕적이게 한 것은 바로 동정이라는 것이다.

 

선배시민은 마리다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리다(마르다+마리아)의 그림은 17세기 회화의 거장으로 펠리페 4세 시절 궁정화가가 된 후 평생 궁정화가로 지낸 벨라스케스(1599-1660)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마리아 집을 방문한 그리스도’라는 작품이다. 이 그림에서 마르다와 마리아는 자매지간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집에 오자 예수이야기만을 듣고 있는 마리아가 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음식을 대접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마르다가 있다. 마르다가 혼자서 일하면서 예수님에게 말한다. “저 아이에게 뭐라고 해주세요!” 그러자 예수님은 “좋아하는 일을 하게 내버려 둬라!”라고 말씀하신다. 이와 같이 마르다 일밖에 모른다. 그리고 마리아는 의미만 알고자 한다. 즉 예수의 이야기에 몰두한 마리아와 일에 열중하는 마르다의 합한 창조형 인간이 마리다이다. 마리다는 의미를 알고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선배시민이 된다는 것은 바로 의미를 알고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후배들의 상황을 자각하고 공감하며, 실천하는 사람이다. 공부밖에 모르면 안 된다. 공부를 하면서 의미를 알아야 한다.

 

자각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모여서 학습을 해야 한다. 무엇을 학습해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퀴클롭스 괴물을 죽일까! 아니면 퀴클롭스의 눈을 어떻게 가려볼까! 하는 것을 학습해야 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보면 오디세우스와 병사들은 퀴클롭스를 죽이지 못하고 창으로 눈을 찌른다. 그런데 눈을 찌를 때 그 과정이 재미있다. 퀴클롭스 괴물이 힘이 쎄서 오디세우스와 병사들을 동굴에 가둬 뒀다. 그리고 맨날 사람을 잡아 던져서 먹는다.

한해 산재로만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2천 명 이상 죽는다. 퀴클롭스가 매일 사람을 잡아먹는 것과 같다. 이렇게 죽는 사람은 이윤 창출 때문에 죽는 것이다. 기업들이 이윤창출 때문에 안전에 소홀했기 때문이다. 같은 상황이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어떻게 하면 저 퀴클롭스 괴물을 물리칠 수 있을까! 하는 것을 고민하게 된다. 그러면서 모여서 지혜를 짜낸다. 하루는 퀴클롭스 괴물이 오니까 퀴클롭스에게 말을 건다. 퀴클롭스1 우리가 생각해 보니 당신이 힘이 제일 쎄다. 그래서 우리는 너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제 우리는 너에게 순응하기로 했다고 말한다. 퀴클롭스는 기분이 좋아지자 병사들은 퀴클롭스에게 줄을 먹인다. 이때 이를 주도했던 사람이 오디세우스이다. 오디세우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웅으로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의 주인공이다. 퀴클롭스는 너는 마음에 드니까 제일 마지막으로 잡아먹겠다면서 오디세우스에게 묻는다 ‘너의 이름이 뭐니?’ 그러자 오디세우스는 ‘내 이름은 Nobody입니다’라고 거짓말을 한다. 퀴클롭스는 ‘Nobody’ 알았다 그러면서 잠이 든다. 그리고 퀴클롭스가 잠 든 사이에 오디세우스와 병사들을 불에 담근 창을 가지고 올라가서 퀴클롭스의 눈을 찌른다. 그러나 퀴클롭스는 눈을 감싸며 외친다. “Nobody blinded me’, “Nobody blinded me’ 그러면서 그의 형제들의 도움을 청한다. 이말은 Nobody라는 놈이 내 눈을 멀게 했어 라는 뜻이다. 그런데 퀴클롭스의 형제들은 퀴클롭스에게 달려와서 들어보니 “Nobody blinded me’라고 외치고 있으니까. 별 미친 놈 다보겠네. 술 주정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그대로 돌아간다. 그러자 오디세우수와 병사들은 그 동굴에서 탈출하게 된다는 얘기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이 근본적인 문제인지를 자각해야 한다.

자각하고 함께 지혜를 모으면 퀴클롭스 괴물을 무찌르고 동굴을 탈출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사회의 문제에 대해 자각하고 학습하면서 실천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퀴클롭스 괴물을 무찌른 사례가 역사적으로 볼 때 영국의 사례이다. 영국의 복지국가에서는 자각한 시민들이 있었다. 당시 영국은 2차 세계대전 중이었는데, 연합군이 승리할 것 같으니까 영국 수상이었던 처칠은 1941년에 11개 내각에 ‘전후계획’을 만들어 보라고 지시한다. 윈스턴 처칠(1874-1965년)은 1906년 이후 자유당 내각의 통상장관, 식민장관, 해군장관 등을 역임한 영국의 정치가였다. 그 전후 계획을 만들면서 베버리지라는 외부 교수를 초빙하게 된다. 그리고 전후계획에 대한 보고서인 베버리지보고서가 1942년도에 나왔다. 그런데 그 보고서가 너무 급진적이라서 처칠은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서 “보고서를 내려면 너의 이름으로 내라’고 말한다. 이 때 나온 보고서가 ‘베버리지 보고서’이다. 처칠은 그 보고서가 나온 뒤에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전쟁이 끝나고 나서 바로 의회를 해산하고 투표를 한다. 왜냐하면 본인 스스로가 전쟁영웅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자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그 당시 시민들은 모여서 그 보고서를 다 읽고 토론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그 결과 영국 시민들은 그 보고서를 받아들인 노동당을 선택하게 된다. 전후 최초로 영국 노동당이 단독 집권하게 되면서 복지국가의 기초가 완성되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각한 시민들이다. 방공호에서, Pub에서, 모임등에서 토론하고 자각한 시민들이다. 시민들이 근본 문제에 대해 토론을 하였고 그 결과 공동체의 방향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오디세우스와 병사들이 모여 토론하면서 지혜를 모은 것과 같다. 그들이 그들의 공동체의 방향을 결정지었다는 것이다. 영국 시민들은 전쟁을 통해 연대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전쟁 전에는 계층 간, 계급 간 차이가 심각했다. 하지만 전쟁을 하는 동안 서로 연대해야만 했던 것을 인식한 것이다. 전쟁 전의 아이들보다 전쟁 기간 중의 아이들이 배급을 받고 자랐는데 더 영양적이고 튼튼해졌으며 잘 자란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불평등이라는 것이 훨씬 더 위험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역설적이긴 하지만 전쟁기간 중에 깨닫고 나서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공동체의 방향을 연대로 정하게 된 것이다.

 

스웨덴의 사례를 보자

스웨덴은 성인인구의 60%가 책 동아리에 참석한다. 그 동아리 이름이 “Study Circle Democracy”라고 부른다. 책 동아리 민주주의이다. 스웨덴은 60%가 오디세우스의 병사들과 같은 시민들이 도처에 서클을 만든다. 이들은 스터디 써클에서 공동체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공동체를 성찰하고 학습하다. 선배시민들이 함께 학습하고 토론한다. 이것이 스웨덴의 책동아리가 SCD 이다.

 

우리가 선배시민이 된 다는 것은 넓게 보면은 노인이기도 하지만, 상대적이기도 하니까 50대에 있는 사람은 30대가 후배시민이고 50대가 선배시민이 되는 것이다. 초등학교 친구들한테는 대학생 선배가 선배시민이 되는 것이다. 넒은 의미에서 선배시민은 후배시민과의 관계에서 성립되는 상대적 개념이다. 이와 같이 선배시민들이 자각하고 학습하고 토론하는 것은 사회변화를 견인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디로 가야할 지를 도처에서 토론하고 공동체의 방향을 정하는 것이다. 그럴 때 변화들이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선배시민들이 모여서 할 수 있으려면 필요한 것이 소통과 대화이다. 그런데 문제는 노인들은 소통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노인들은 불통세대이다. 선배시민이 후배와 소통하기도 어렵고, 후배들도 선배들과 소통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청년들 고단한 하루 하루를 보내는 젊은이 들이 있다. 그리고 이들을 바라보는 노인들이 있다. 노인들의 시선은 어떨까?

노인들은 말한다.

“열심히 사는 것 같지가 않아요. 우리가 볼 때는”, “의지가 약해 우리 때 같지가 않아”, “모든 게 자기들 탓이지, 남 탓할 거 하나도 없죠.”, “3D업종은 아에 돌아보지도 않고 편한 일만 찾으려는 나약한 존재들”

그래서 지금의 청년들의 문제는 “능력이나 의지의 문제일 뿐, 구조나 제도를 탓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노인들의 생각”이다.

 

청년들은 말한다.

그렇다면 오랜세월 평생을 국가를 위해 가족을 위해 헌신했던 노인들, 이들을 바라보는 청년들의 시선을 어떨까.

“ 남의 말을 전혀 안 들으시잖아요. 고집불통”, “당신들 말이 다 옳다고 하는데 대화가 되겠어요.”, “잔소리 좀 그만 했으면 좋겠어요.”, “세대차이가 느껴져 별로 대화하고 싶지가 않아요.”

 

꼰대, 남의 말은 전혀 듣지 않고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청년들은 노인들이 자신의 말이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고 청년들의 말을 전혀 들으려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사회를 비판하거나 잘못을 지적하면 빨갱이라 치부한다는 것이다. 무조건 정부가 옳다고 주장하는 한마디로 꼴통이라고 여기고 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 못된 것일까요. 이들 세대간 상호이해와 대화가 불가능한 것일까요.

 

노인들은 정말 대화하기 힘든 사람들이라는 얘기이다. 무엇이 대화하기 힘들다고 생각하니?라고 물었을 때, 노인들은 당신들이 옳다고만 생각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틀렸다는 것이다. 왜 틀렸는지를 물어보았더니 우리 때도 저 저 정도는 힘들었다는 것이다. 너희들이 보릿고개를 경험해 봤어? 라고 말한다.

젊은이, 너희들의 문제는 의지력의 문제, 나약함의 문제로 생각한다. 빚이 좀 있어야 파이팅 한다고 생각한다. 고등학교만 졸업시켜서 빨리 내보내야 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젊은이들은

“어르신 우리 시대에 젊어 봤어요?”라고 말한다.

소통을 어렵게 하는 서로 다른 환경이다. 우리 노인세대들이 다녔던 초등학교 아이들과 지금 다니고 있는 초등학교 아이들과는 너무나도 서로 다른 환경이다.

이러한 서로 다른 환경이 소통을 어렵게 한다. 그래서 대화가 될 수가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저런 상황이 꼰대라고 한다는 것이다.

꼰대는 기성세대나 선생을 뜻하는 은어이다. 전혀 얘기가 먹혀들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는 그들을 공감의 눈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해를 한다는 것은 공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감은 그 시대를 알고 연대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르신과 대화할 때 “저 사람의 이야기에 동의를 하지 못해도 인정은 해야 된다.”는 것이다.

나 사실 너의 얘기에 동의는 못한다. 그런데 시대를 보니 ‘그럴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때 청년들은 ‘어르신, 어르신은 꼰대잖아요. 근데 내가 어르신의 말씀에 동의할 수는 없어요.

그렇지만 인정은 해요. 저도 어르신처럼 6.25와 독재시기, 산업화시기를 거쳤기 때문에 저도 그렇게 생각했을 거에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서로의 시대를 이해할 때, 공감을 하게 된다. 이렇게 대화가 시작되고 소통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자각이다.

근본 문제에 대한 자각을 하고 난 후 뭔지 몰라도 모여가지고 학습을 한다. 학습을 통해 지혜를 모은다. 세대 간 공감을 통해 시대를 알고 연대하는 것이 소통이다.

 

 

또 하나의 사례는 신창원과 표창원이다.

신창원은

“선생님이, ‘이 쌍놈의 새끼야, 돈 안 가져 왔는데, 뭐 하러 학교와, 빨리 꺼져’ 하고 소리쳤는데 그때부터 마음속에 악마가 생겼다.”고 말하였다.

 

신창원(1967-)은 강도치사죄로 무기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 1997년 탈옥 했다가 1999년에 검거된 인물이다. 범죄자 신창원을 만든 것은 개인이 아닌 사회였다는 것이다.

 

신창원과 비교되는 사람이 표창원이다.

표창원은 신창원과 시대가 비슷하다. 나이도 한 살정도 차이가 있다. 표창원은 ‘신창원이 하고 나하고 나이도 비슷하고, 자란 환경도 비슷하다.’고 말한다. 표창원은 현재 국회의원이다.

신창원은 엄마가 안계셨고, 표창원은 아버지가 안계셨다. 자라면서 말썽 피우는 것도 비슷했다. 문제 학생이었다는 신창원과 표창원이다.

그런데 신창원에게는 소통할 수 있는 어른이 없었다. 신창원 아버지는 신창원 끌고 소년원에 가서 ‘우리 얘 사람 좀 만들어 달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창원 거기에 들어갔다 나오면서 완전히 범법자가 된 것이다.

 

표창원은 달랐다. 표창원은 엄마에게 욕을 듣고 나오면 ‘진영엄마’라는 분이 있었다. 엄마에게 혼이 난 어린 표창원을 따뜻하게 안아줬던 진영엄마와 학교에는 선생님이 있었다고 한다.

신창원과 표창원의 차이는 소통할 선배시민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차이라고 생각된다. 한사람은 시대의 범죄자가 되고, 다른 한사람은 국회의원이면서 범죄 파일럿이 되었다.

결국 소통이라는 것이 한 사회의 범죄자를 만들 수도 있고, 예방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소통이 안 되었을 때 무시무시한 사례가 또 있다.

프리모 레비가 지은 「이것이 인간인가」하는 책의 내용이다. 프리모 레비(1919-1987)라는 사람은 유대계 이탈리아 화학자이자 작가이다. 아우슈비츠 생존자로 경험을 쓴 「이것이 인간인가」의 저자이다. 감옥에서 3년여를 살다가 겨우 겨우 살아났는데, 3년간의 폴란드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에서 보낸 체험과 관찰을 기록한 책이다. 그런데 프리모 레비가 궁금한 것이 있었다. 히틀러의 시민들에게 ‘당신이 왜 히틀러 시대에 저항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히틀러 시대에 약 600만명의 유대인이 죽었다. 그 중 100만명은 아동 청소년들이었다. ‘당신들은 600만명을 죽일 때 당신은 정말 몰랐는가?’라는 물음이다. 히틀러 시민들은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죽는지 몰랐다.’라고 대답하였다. ‘히틀러가 그렇게 나쁜 사람인 줄 몰랐다.’는 것이다.

프리모 레비는 ‘정말 몰랐을까?’라는 것에 의문을 가졌다. ‘600명도 아니고 600만 명이나 죽였는데 정말 몰랐을까?’ 그러고 난후 독일시민들을 만나본다. 그리고 깨달은다. ‘아 정말 몰랐을 수도 있겠다.’ 왜 그렇게 프리모 레비는 생각했을까. 프리모 레비는 ‘이 사람들이 알고 싶지 않아서 알지 못했다.’라고 얘기한다. 왜 알고 싶지 않았을까?

알며는 고통스러울까봐 그랬다는 것이다. “니들 알면서도 그렇게 히틀러에게 협력했어?” 그럴까봐 그랬다는 것이다.

히틀러와 공범자이고 싶지 않았던 당시의 독일 시민들이었다. 그 당시 불문율 3가지가 있었다는 것이다.

 

첫째,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는다.

둘째, 모르는 사람은 질문하지 않는다. 왜 질문하지 않았을까. 알까봐 그랬다는 것이다.

셋째 질문하는 사람에게는 대답하지 않는다.

 

앞서 말한 대로 연민이라는 것은 혼자서 고민하고, 슬퍼하고, 해결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공범자 의식을 갖지 않으려는 것이다.

공범자 의식을 갖지 않으려 했던 당시 독일 시민은 무죄일까. 유죄일까? 프리모 레비는 유죄라고 보았다.

그들은 고의적인 태만함을 갖고 있었기에 나는 독일시민은 유죄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의도된 무지라는 것이다.

 

선배시민이 할 일은 후배시민을 품는 일인데, 선배시민의 시작은 자각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하였다. 어찌 보면 선배시민의 시작은 ‘고의적 태만함에 대한 자각’이다. 즉 고의적인 태만함이 나에게 있지 않나 하는 자각이 필요하다. 자각을 했는데 뭔지 몰라도 불확실하다. 그래서 그 다음이 모여서 학습을 하는 것이다. 선배시민의 자각 후 학습을 통해 연민하고 안도했던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 동안 나는 연민하고 있어고 상당히 괜찮은 사람이라고 안도만 하고 있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선배시민은 학습에 따른 공감을 통해 분노해야 하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그들이 분노를 하면 정부는 트라우마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의사를 내보내고 정신과 치료를 말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즉 정당한 분노를 자꾸 정신병, 트라우마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트라우마 센터가 생기기도 했다. 우울증 걸리겠구나. 정신병 걸리겠구나 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연민이다. 정당한 분노를 하고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에 대한 소통광장에서 성찰하고 학습을 통해 연대하면 실천하는 것이다. 소통을 하는 것이다.

 

선배시민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후배시민을 품는 일이다. 그들을 단지 연민을 가지고 힘들지! 아프지!라고 품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 연민을 넘어서 공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감은 문제의 본질을 묻고 동시대의 사람들의 문제로 인식하고 함께 모여 소통하는 것이다.

 

프리모 레비에게 다시 와보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선배시민의 길은 자각하고 학습하고 소통하는 것이다. 그 시작은

 

아는 사람은 말하고,

모르는 사람은 질문하고,

질문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대답을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선배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후배가 된다. 그러면서 후배시민을 품어야 한다. 질문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대답한다.

 

 

* 이 글은 유범상 교수의 ‘No人인가 Know人인가? 선배시민, 후배시민을 품다’의 특강내용을 재정리한 내용이다.